칼럼 소개
집을 짓는다는 것은 가족에게 꼭 맞는 옷을 짓는 일과도 같습니다. 그 공간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가족의 삶이 온전히 시작되고 축적되는 터전이 됩니다. 집과 가족은 결국 서로를 완성하는 관계입니다. 땅집고는 예능 프로그램 ‘러브하우스’를 통해 국내 인테리어와 건축의 대중화를 이끌어온 양진석 와이그룹 대표가 2016년에 완공한 여섯 채의 집을 소개합니다. 각각의 집에는 건축적 해법뿐 아니라, 한 가족의 삶을 담아내기 위한 고민과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인천 강화도의 한적한 마을에 사는 50대 부부는 열한 살 아들과 여섯 살 딸을 두고 있었다. 아버지는 일용직으로 생계를 꾸리고 있었고, 어머니는 외할머니의 병간호로 집을 자주 비웠다. 어린 남매는 비어 있는 집을 스스로 지키며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그 집은 구조적으로 불안했고, 습기와 단열 문제로 사계절 내내 생활 환경이 열악했다. 우리가 새로 짓고자 한 집은 단순히 낡은 집을 대체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여 가족의 건강을 지켜주는 집, 그리고 동네 친구 없이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야 하는 남매에게 다양한 공간적 경험을 제공하는 집. 그것이 설계의 출발점이었다.
땅을 거스르지 않는 집
대지는 북쪽으로 낮은 산을 두고, 남쪽으로 넓은 평야가 펼쳐진 형태였다. 우리는 지형을 인위적으로 평탄화하지 않았다. 땅의 레벨 차이를 그대로 살려 공간의 성격을 나누기로 했다. 높은 뒤편에는 보다 입체적인 공간을 계획하고, 낮은 영역에는 일상적 생활 공간을 배치했다. 남측에서는 낮게, 북측에서는 다소 높게 인식되는 경사지붕을 적용해 지형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도록 했다. 이는 전통 건축에서 배치와 경관을 다루는 방식에서 영감을 받은 선택이었다. 건축은 대지를 정복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맥락에 순응하는 태도에서 시작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경계의 재해석
외부에서 내부가 쉽게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내부에서는 충분히 바깥을 조망할 수 있도록 ‘투시형 담장’의 개념을 적용했다. 특히 현관은 외부에 속하지만 내부처럼 인지되는 중성적 공간으로 계획했다. 이를 통해 채광을 확보하면서도 사생활을 보호하는, 균형 잡힌 경계를 만들고자 했다.
또한 외벽 바깥에 하나의 가벽을 더 세워 더블 레이어드 월(Double Layered Wall)을 구성했다. 이로써 생긴 완충 공간은 여름에는 차양 역할을, 겨울에는 단열 기능을 수행한다. 동시에 테라스로 활용해 외부와의 접점을 확장했다. 바닥은 우드 덱 대신 특수 모르타르를 사용해 기능성과 디자인의 밀도를 높였다. 건축에서 작은 선택 하나가 공간의 체감 온도와 생활의 질을 바꾼다. 벽 하나의 추가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계절을 조율하는 장치다.
틈에서 태어나는 공간
두 개의 매스를 반 층씩 어긋나게 배치한 스킵 플로어 구조는 수직 동선을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상부와 하부 사이에 형성되는 중간 공간에는 메자닌 개념을 도입해 남매의 전용 놀이공간을 마련했다. 버려질 수 있는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집 안에 또 다른 세계를 만든 셈이다.
매스 사이에는 의도적인 틈을 두고 채광창을 설치했다. 이 틈은 빛을 들이고, 시선을 연결하며, 계단 공간을 하나의 장면으로 드러낸다. 집 안에서 집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구조는 공간에 깊이를 부여한다.
빛과 창의 태도
키즈룸 상부에는 남향의 빛을 받을 수 있도록 창을 냈다. 이 창은 단순한 채광창을 넘어 하늘을 바라보는 조망창이 된다. 아이들이 누워서도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경험은 공간이 주는 작은 선물이다. 창호는 단열 성능이 뛰어난 PVC 이중창을 사용했다. 고급 소재라는 인식과는 별개로, 주거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성능과 삶의 질이다. 건축은 보여주기 위한 선택보다, 거주자를 위한 선택이 우선되어야 한다.
집 안의 길
이 집에는 ‘길’이 있다. 외부에서 시작된 동선이 내부로 이어지며 하나의 작은 마을처럼 구성된다. 실내와 실외를 명확히 구분하기보다 흐름 속에서 연결되도록 한 것이다. 이 길은 기능적으로 바람이 통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집이 숨 쉴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은 단순한 환기를 넘어, 공간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작업이라 생각한다.
여유를 만드는 거리
도로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배치한 계획은 법적 기준을 충족하는 것을 넘어 심리적 여유를 확보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건축물과 도로 사이의 간격은 거주자뿐 아니라 마을 전체의 풍경에도 영향을 준다. 집 하나가 동네의 밀도를 조정하고, 풍경의 호흡을 완화할 수 있다.
아이들에게 주는 공간의 선물
집 뒤편 K룸에는 경사지붕을 적용했다. 외부에서는 단조로움을 피하고, 내부에서는 높은 층고를 확보해 아이들에게 개방감을 선사한다. 경사면이 만들어내는 원근감은 공간에 깊이를 더하고, 일상의 장면을 조금 더 특별하게 만든다.
이 집은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고, 계절을 온전히 느끼며, 가족이 건강하게 머무를 수 있는 환경을 갖추었다. 건축은 결국 사람을 위한 일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삶이 공간과 함께 자라날 때, 비로소 집은 완성된다.
필자 소개
양진석 건축가는 성균관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교토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과정을 수료한 뒤 안양대학교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와이그룹 대표 건축가로 활동하며, 건축교육프로그램 파이포럼의 주임교수로서 후학 양성과 건축 담론 확장에 힘쓰고 있다. 그의 저서 『집 짓다 담다 살다』(컬쳐그라피)는 방송을 통해 선보였던 여섯 채의 집을 중심으로, 기획과 설계, 완성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담아낸 기록이다. 방송에서는 다 전하지 못했던 건축적 고민과 현장의 이야기를 함께 담아내며 집을 짓는다는 행위의 의미를 깊이있게 조명한다.